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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당 2019-01-24T14:34:12+00:00

에코비전 21 인터뷰 기사

작성자
윤학수
작성일
2019-03-05 23:08
조회
1328

  1. 요즈음 퇴임 이후 더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안다. 어떤 일들로 그리 바쁜지?


- 전역 후에 현역 시절 보다 더 바쁘다고 하면 현역 시절에 너무 편하게 살았다는 것인데, 사실은 현역으로 근무할 때가 열 배는 바빴을 것이다. 다만, 현역 신분으로 하지 못했던 활동들을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하다 보니 바쁘기도 하고 보람도 많이 느끼는 제2의 삶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즈음 내 한 주간의 기본적인 시간표를 보면,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에서 국제전략교류협회장 신분으로 출근하여 미국, 일본 및 중국의 예비역 장성들과 대화를 이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고, 월요일 저녁에는 BPMC(Beyond Pleasure Male Choir)라는 이름의 남성성가합창단에서 밤 열 시까지 합창 연습을 한다. 합창 연습을 끝내고 분당을 지나 태재고개 너머에 있는 집에 도착하면 거의 자정을 넘긴 시간이고, 그래서 화요일 아침 하수구 청소에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화요일 오후에는 매주 청춘합창단 연습이 있다. 수요일 저녁에는 서당에서 금곡 선생님 문하생으로 공부를 한다. 이제 일 년 됐는데, 조금씩 붓글씨에 재미가 붙는 것 같다. 일요일에는 교회 성가대원으로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노래하고 나면 힘이 부칠 때도 자주 있다. 그 외에도 사회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일 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작년에는 공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 고등학교 동기회장, 합창단 단장 등, 꽤 굵직한 역할을 대 여섯 개나 했고, 각종 포럼과 세미나 참석도 하면서 때로는 운동도 해야 하다 보니 정말 바쁜 해였는데, 2019년에는 짐들을 많이 벗어서 훨씬 홀가분하게 새해를 시작했다.

   

  1. 군 퇴임 이후 사회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 나는 현역시절에 누구 못지않게 바쁘게 살았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여럿 했다는 자부심이 없지 않지만, 정말 다행하게도 내 마음 속에 권위의식이 없고, 일과 가정생활의 한계를 잘 지키면서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전역 후에도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점은 안식구가 내 삶을 잘 관리해 주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 가지 어려웠던 것은 현역 때는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살면서도 누군가 관리해 주고 도와 주는 사람이 있어서 시간 활용을 잘 하다가 퇴역해서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하면서 시간 낭비가 많았던 것에 대해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대중교통에 적응하는 것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는데, 이제야 조금 편해졌다. 군에 있을 때는 내가 군사정보의 총책임지이다 보니 만나는 대상이 크게 제한적이었는데, 일반 사회인이 된 후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만남의 축복을 끝없이 누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1. 윤장군님은 학창시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일반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 임관 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전투조종사가 된 이후에도 자기계발에 충실하여 미국 공군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셨고, 장관 부관, 작전사령부 전투계획과장, 주미 공군무관, 국방정보본부 미국/미주과장, 공군참모총장 지휘관리과장 및 연합사 정책처장 등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핵심보직을 두루 역임하셨으며, 장군으로 승진한 이후에는 공군 제16전투비행단장, 한미연합사령부 정보참모부장에 이어 국방 정보를 총괄 지휘하는 정보본부장까지 역임하셨습니다. 전역 후에도 공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 역할까지 수행하셨다. 이러한 경력으로만 보아도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성공한 삶을 살고 계신다. 이처럼 성공 뒤에는 나름의 삶의 원칙과 철학이 있을 것으로 안다?


- 내가 조금이라도 내 앞을 볼 눈이 있었다면 나의 삶은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만큼 물 불 가리지 않고 열심을 다해 살아온 것 같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몸 속에 조선의 선비정신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상이 물려 주신 나의 피 속에 그런 DNA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타협을 잘 못한다. 무슨 일이건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충돌도 잦다. 심지어는 선배들조차 나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윗사람이 그릇된 일을 시키면 참지 못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사람이 가끔은 본의 아닌 거짓(White Lie)을 말할 필요가 있기도 하지만 나는 그걸 못한다. 그래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을 얘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매사에 슬기롭게 처신하려는 집사람과 의견충돌을 빚을 때가 왕왕 있다. 어찌 보면 나 같은 사람은 군이라는 사회에서 출세하기 어려운 성격인데, 어쩐 일인지 동기생 중에서 최고의 계급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지금 되돌아 보면 육십 여 년의 지난 세월을 내가 알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이미 설계된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신앙적으로는 하늘이 나라는 사람을 써서 나라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하도록 끌어 오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름의 인생 철학이 있었다기 보다는 신앙이 나의 원칙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1. 윤장군님의 부부 금슬은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좋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40년 가까운 어려운 군생활을 묵묵히 내조해 주신 부인에 대해 자랑해 달라?


- 금곡 선생님은 가끔 우리 집사람을 보면서 “키가 작기에 망정이지 키까지 늘씬했으면 어쩔 뻔했어?”  하고 농담을 하신다. 그만큼 우리 집사람 김혜경은 큰 사람이다. 자랑을 하라면 우선 예쁘다 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말에 모임에서 처음 본 순간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내 아내가 되어있는 것은 하늘이 이미 점지해 주신 내 짝이었기 때문이겠지. 40년 가까이한 이불 덮고 살면서 천생연분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사실 나는 굉장히 무뚝뚝하고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가 금슬이 좋은 것으로 비치는 것은 순전히 집사람 탓(?)이다. 그만큼 그 사람은 상황에 맞게 행동할 줄 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김혜경은 어느 자리에 가건, 어느 위치에 서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3년 동안 군사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에 매주 한 두 번씩 계속되는 하우스 파티를 며칠씩 손이 부르트도록 준비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한 적이 없다. 나는 오히려 미련스럽게 일한다고 핀잔을 줄 정도였지. 새로 마련해 갖고 간 행주치마가 귀국할 때는 너덜너덜했으니 더 무슨 얘기를 할까. 비행단장으로 부임하니 이번에는 삼천 명 비행단 식구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단다. 꼬박 두 해, 730일 동안의 비행단장 기간 동안 우리 공관에 손님이 없던 날이 채 열흘이 되지 않았으니, 그 열정과 친화력, 그리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모두를 편하게 만드는 능력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다. 지금도 내 부하로 근무했던 사람들은 내게 연락하기 보다는 집사람에게 먼저 전화한다. 나는 어렵기만 한 사람이니 그럴 수 밖에. 나는 보국훈장을 여러 개 탄 사람이지만, 사실 나라에서는 그보다 더 값진 국가 훈장을 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미군 장병들은 부인에게도 상당한 보상의 뜻을 표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나라는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무려 40회에 가까운 이사를 하면서도 연년생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것도 집사람이다. 돌아보면, 그 작은 덩치에 아들녀석 둘을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 훌륭하게 키워낸 것은 가히 초인적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철부지였던 이 남편은 이제사 철이 들어 마나님을 공주처럼 모시고 싶어할 뿐이다. 지난 ‘91년의 일이다. 비행단 전투조종사 임무를 마무리하고 오산 작전사령부로 배속을 받았다. 그런데 단장님께서 “오산이 애들 교육에는 최악의 지역이니 이번 기회에 집사람과 애들을 서울로 정착시키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조언을 주신다. 그 말이 옳다 싶어 집사람에게 그대로 전했더니,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는 말이 “내가 봉급이 적다고 불평을 해봤냐? 집이 작다고 아쉬운 얘기 한 마디 하더냐? 아무리 가난해도 힘든 줄 모르고 사는 것은 당신이 함께하기 때문인데 이제 와서 따로 살라 하면 나는 못산다.”한다. 그래서 우리는 긴 군생활 동안 한번도 따로 살지 않았다. 그래도 큰 애는 의사가 됐고, 작은 아들은 건축가로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잦은 이동으로 인해 자식 농사에 성공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우리 애들이 잘 커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애들도 잘 낳아 기르는 것을 보면 이보다 큰 축복은 없을 둣하다.

집사람 카카오톡 아이디가 ‘멋진 남자와 사는 여자’다. 덕분에 나도 멋진 남자가 됐다.

 

  1. 음악에도 남다른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안다. KBS 청춘합창단을 진두지휘하며 UN공연을 성황리에 마쳤고, 이후 다양한 공연일정을 진행해 오고 있다. 합창단을 구성하게 된 계기와 청춘합창단에 대해 소개해 달라?


- 지금은 법인이 되어 (사단법인) ‘남자의 자격 청춘합창단’으로 이름을 붙인 우리 합창단은

2011년 6월에 KBS2TV 남자의 자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3개월 한시적 활동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그 3개월 동안의 준비 기간의 다양한 활동이 공중파를 타면서 전 국민이 토요일 저녁에 TV 앞으로 모여 울고 웃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3개월 동안의 활동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 해 12월 KBS 연말결산에서 청춘합창단은 감동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합창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서로 소리를 맞추다 보면 정이 깊어지고, 헤어짐이 어려워진다. 수천 명의 응모자 중에 선발되어 3개월을 동고동락했던 40명의 단원들이 쉽게 헤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해 11월 청춘합창단은 순수한 민간 합창단으로 재탄생하기에 이른다. 처음 인원은 연예인이나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약 25명 정도의 단원들로 출발해서 지속적으로 인원을 보강하여 현재는 50명 가까운 정예 멤버로 발전했다. 나는 이 합창단이 방송을 타던 2011년에는 정보본부장으로 근무 중이어서 합창단 가입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이듬해 전역이 결정되면서 당시 부단장으로 계시던 고등학교 선배님의 권유로 입단할 수 있었다.

그 분이 지금 합창단 단장으로 우리를 이끌고 세계 최고의 노년합창단을 목표로 끝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처음 2년 동안은 우리 나라 합창계의 최고 원로이신 윤학원 선생님의 지휘 아래 기초를 다져, 첫 정기연주회를 일산 아람누리 극장에서 가질 수 있었다. 이후 지금의 김상경 선생이 지휘봉을 잡고 벌써 5년이 넘게 우리를 지도하고 계신다. 그 분의 목표가 바로 세계 최고의 Senior 합창단이다. 벌써 예술의 전당과 롯데 콘서트 홀에서 두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가졌고, 올해 5월에는 제4회 정기연주회를 롯데 콘서트홀에서 다시 가질 계획이다. 국내 연주는 물론, 우리 합창단은 ‘Go Global’의 기치 아래 벌써 세번의 해외 연주를 다녀왔다. 첫 해외 연주가 음악인이라면 꿈의 무대라 할 수 있는 UN본부 공연이었으니, 우리 청춘합창단은 천운을 타고난 합창단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유엔 공연을 다녀온 이야기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얘기가 나올 듯하다. 2017년에는 오스트리아 두번째 도시 그라츠에서 개최된 ‘세계 합창 축제’에 아시아 유일 팀으로, 또한 유일한 Senior 합창단으로 참석하여 개막식과 폐회식은 물론, 그라츠 시장 초청 연주까지 대성황을 이뤘다. 특히 마지막 폐막 공연에서는 무려 5분 가까운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모짜르트와 카라얀을 배출한 음악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는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연주가 형평 없으면 계란이 무대로 날아들기도 하는데, 우리를 그 축제에 초청한 사람도 20여 년의 오스트리아 생활에서 그런 박수는 본 적이 없다니, 우리가 대한민국의 품격을 세계인들에게 충분히 과시한 쾌거였다고 자부한다. 지난해 추석에는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 위문공연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공연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는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 화제를 돌려 안보문제를 논의해 보고 싶다. 최근 북미관계를 비롯한 국제정세는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이고 국내 정국 또한 불안하기 그지없다. 무엇이 문제이고 이러한 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우리 국민의 안전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외국의 손에 맡겨진 큰 위기를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아직 모든 일이 진행 중이고,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어떤 얘기도 단언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연합사 정보참모부장 4년과 국방정보본부장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줄기차게 강조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국민의 마음이 분열되고 있는 점이라 하겠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국민이 한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미동맹이라 하겠다.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북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다름 아닌 한미동맹이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개인이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기에 우리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1. 일본 초계기가 지난달 1월 23일 이어도 인근 해상에서 우리 해군 함정을 향해 위협 비행을 했다고 우리 국방부가 당일 발표한 이후 한일 관계를 우려한 것인지 일본 초계기의 위협 비행은 없었다는 보도가 뒤를 이었다. 위협 비행을 했다면 한일관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듯싶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바라봐야 하는가?


- 사실 이 문제는 실무진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근래에 쌓인 여러 앙금으로 인해 과민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인기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한 요소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은 일본이 먼저 사태를 수습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는 일본과 이런 관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피맺힌 한이 있지만, 우리는 더 큰 꿈을 안고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나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라, 지난 해 시월 일본 예비역 장성들과의 세미나에서 모두가 공감한 사안이다. 

 

  1. 아직까지 우리 대한민국은 냉전의 한 가운데 있다. 최근 모병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국방개혁 2.0의 핵심 골자는 병력 축소다.  안보가 위중한 나라에서 징병제 폐지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어떻게 바라보는가?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모병제는 시기상조라는 것이 내 의견이다. 다만, 통일 이후의 먼 미래를 위한 구상에서는 이 또한 좋은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방개혁 2.0의 핵심은 병력 축소가 아니다. 점진적으로 줄어드는 병력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를 기획한 문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부나 국방부에서 이에 대해 국민 홍보를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해서 왜곡된 내용이 많이 보도되고 있는 점이 안타깝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우리 성우회는 국방개혁 실무자들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병력 문제도 무조건적 축소가 아니라 현실에 맞춰가면서 점진적으로 줄여가는 방안을 건의하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수정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 요즈음 사회를 일러 ‘황금에 눈먼 시대’ 그리고 ‘출세지상주의’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경제와 출세를 위해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을 정도다.  많은 이들의 고민이 깊다.  젊은 청소년들과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황금만능주의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출세하고 싶은 존재들이기에 출세하려는 노력을 폄하해서도 안된다고 본다. 단지, 무리하고 편협하게 돈 만 추구하고, 부도덕하게 출세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여겨서는 아니될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처럼, 도덕이 올바르게 뿌리내린 사회가 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역시 해답은 교육에 있겠다. 지금부터라도 교육체계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나라의 교육이 점점 더 나락으로 빠지는 것 같아 두려움이 앞선다.

청소년들과 후진들에게 한마디 충고를 하라면, 밝고 맑고 깨끗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을 들겠다.

 

  1. IECD 준비위를 위한 하수구 청소가 5년째다. 대부분 부부가 빠짐없이 나올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른 새벽 나온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고 건강한 대한민국과 세계를 위해 일상에서 이런 것은 바꾸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 우리 부부가 최근에 바쁘다는 핑계로 청서에 많이 빠져서 솔직히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다. 가끔 마음이 느슨해질 때 금곡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면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 발걸음을 혜화동으로 옮기곤 한다. 경기도 광주시에서 혜화동까지 오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져서 점점 힘이 더 들긴 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더 열심히 참여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건강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BMW(Bus, Metro, Walk)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도 전역한 지 7년이 되어가면서 이제는 대중교통 이용이 많이 숙달 되어서인지, 운전하면서 흘려 보내야 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하루 서너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어 좋다. 덕분에 좋아하는 음악감상도 많이 한다. 우리 청춘합창단은 모든 공연에서 악보를 보지 않고 모든 곡을 외워서 부르는데, 매일 덤으로 주어지는 버스와 지하철에서의 서너 시간이 없으면 곡을 외우지 못해 힘이 들 터이니 합창단 가는 일이 즐거움만은 아닐 것이다. 하루에 걷는 양도 운전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건강에도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도랑 치고 가제 잡고,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바로 BMW운동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