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당
열린 마당 2019-01-24T14:34:12+00:00

강릉 비행장의 추억

작성자
윤학수
작성일
2019-03-05 23:17
조회
18548
큰아들이 동해시에 둥지를 틀어서 요즘은 여섯 살 손자 녀석과 돌 지난 손녀를 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대관령을 자주 넘는다. 아들들 키울 때는 몰랐는데 손주들은 왜 그리 보고 싶은지, 시간만 나면 영동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려 딱지도 여러 차례 뗐다.

동해시를 가려면 내 제2의 고향인 강릉을 지나야만 하는데, 그때마다 조종사로서의 아픈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그 아픈 기억은 어느새 3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동부전선 첨단기지 강릉 비행장의 F-5 전투비행대대 비행대장(비행대대는 비행대와 정비대로 구성되는데, 그 비행대의 운영을 책임지는 부대대장 격의 직책)으로 재직 중이었다.

부하 조종사 중에 걸출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나보다 11년 후배인 중위인데,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고,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용모까지 갖췄고, 비행 기량은 물론, 업무와 운동까지 모든 면에 완벽한 팔방미인이기도 했다.

중위 봉급으로 어렵사리 신접살림을 꾸린 이 중위의 부인 또한 170Cm의 늘씬한 몸매에 미모까지 겸비해서, 두 사람이 시내에 나들이를 가면 강릉시가 훤해진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우리 큰아들이 “아빠, 나는 언제 결혼해?”하고 물을 정도로 두 사람은 군계일학이었다.

이 중위는 조종사 아파트의 바로 내 윗집에 살았는데, 없는 살림에도 운전병을 비롯한 병사들에게 자주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자주했고, 나도 저녁 반찬이 조금 푸짐한 날은 이 중위에게 전화해서 “숟가락 들고 내려와” 하는 사이가 됐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대지사격 훈련임무로 이륙한 이 중위는 비행기 결함으로 사고를 당해 애기와 함께 산화하고 말았다. 당시 부인의 배 속에는 8개월 된 딸아이가 자라고 있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느끼던 아픔은 상상을 초월한다.

긴급하게 장례 절차가 진행되면서 나는 가족들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비행단장이 나를 따로 불러서 “잘못하면 가족들이 고소할 수 있으니 항공기 결함으로 사고가 났다는 얘기는 절대 하지 마라”고 당부하신다. 하지만 같은 조종사로서의 내 생각은 단장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빈소가 차려진 체육관 한 구석에서 나는 두 집안의 대표이신 이 중위의 큰 형님과 이 중위 부인의 외삼촌과 마주앉았다.

나는 두 분에게 전투조종사의 어려운 삶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전투기가 한 번 비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비 노력을 기울이는지도 낱낱이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날던 비행기에 순간적인 결함이 발생할 수 있고, 임무에 따라서는 순간적인 대처가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급강하 폭격을 하다가 비행기가 조종이 되지 않는 결함이 발생한 이번 사고가 그 대표적인 사례임을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다행히 두 분은 내 설명으로 이 중위의 명예를 지켜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아마도 그가 잘못해서 국가 재산을 소실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셨던 것 같다. 이해해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린 다음 나는 장례식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이 중위 부인의 앞날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인데 애 하나 데리고 평생을 혼자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맏딸인 그녀의 오라비가 되어 가능한 한 빨리 다시 시집을 보낼 터이니 협조해 주십시오.” 이에 이 중위 형님은 “지금 당장 핏덩이를 내게 주면 키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니 다섯 살까지만 키워주면 이 중위와 관련한 모든 권한을 부인에게 주겠다” 하신다.

눈물로 이 중위를 하늘로 보낸 지 꼬박 십년. 나는 정말 오빠가 동생 시집보내듯, 그녀에게 좋은 사람을 맺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다 성사됐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깨어지는 또 다른 아픔을 여러 차례 겪은 끝에, 정말 신기하게도 어느 영험 있는 부인이 예견했던 서른다섯 살 나이에 그녀에 대한 상사병으로 죽어가던 교회 전도사의 구애에 못 이겨 내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중학교 선생님으로 예쁘게 자란 유복녀 딸아이,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영재 수준의 아들까지 두고 시골 교회 목사 사모님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그녀의 귀티 나는 모습을 가끔씩 보면서 지난 시간의 아픔을 같이 씻곤 하니, 대관령을 넘을 때마다 그 당시의 시린 마음이 다시 느껴지는 것은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강릉에 대한 나의 사랑에 포함된 역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