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당
열린 마당 2019-01-24T14:34:12+00:00

Just hang in there

작성자
권대욱
작성일
2019-03-24 07:14
조회
1057
오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비디오와 함께 들으니 너무나 좋다

연주자의 표정과 손놀림
청중과 배경을 보며 들으니 음악의 깊이와 감흥이 엄청 다르다

다음주면 내가 애정하는 QUAD 오디오와 연결된다

지금 들어도 좋은데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오늘이 기쁘고 내일이 기다려진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 마음

이런 마음으로 또 오늘을 사는 것이니

그러니
우리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
#강남순 교수의

<살아냄, 그 버팀의 철학>
--'Just-Hang-In-There'--이 내 마음을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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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에 나는 영어로 "hang in there"라는 말을 각기 다른 두 사람과 나누었다. 한 사람에게는 내가 그 표현을 썼고, 다른 한 사람은 내게 그 표현을 써 보냈다. "hang in there"라는 영어 표현은 '잘 버티어라, 잘 견뎌내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두 사람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어구가 등장하는 것은 우연한 일치인가. 나 개인적으로는 별로 사용하지 않아 왔지만, 미국에서는 흔하게 쓰는 이 표현을 이곳 토요일 아침에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느 페친의 글을 읽으며,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아니지만,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느꼈다. 많은 사람은 이 세계 곳곳에서 그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나 만의 삶의 짐을 두어깨에 지고 힘겨운 걸음을 내 딛고 있다. 삶의 짐이란 인간이란 누구나 있다 라는 '반복성'의 차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삶의 짐은 계속되는 것이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그 '반복성'과 '편재성'에의 인식이, 우리 각자가 지닌 그 삶의 짐의 고유한 독특성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감과 같은 어떤 병에 걸리면, '누구나 병에 걸린다'는 그 편재성에의 인식을 한다고 해서, 그 병에 걸린 사람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수한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인간의 삶에 대하여 다양한 지식/이론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어떤 하나의 삶의 철학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전적으로 들어맞는 것이란 없다. 마음에 드는 철학이 있다면, 그저 많은 참고서중의 중요한 하나로 간주해야만 한다. 최근 서울신문 칼럼에 밝혔듯이, '시대의 스승' 또는 '시대의 멘토'와 같은 표현에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언젠가 한국에서 나의 책 출판기념강연장에 갔는데, 세워놓은 안내 포스터가 있고 그 커다란 포스터에 있는 나의 사진 밑에 "우리 시대 인문학 멘토"라는 표현을 붙인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함께 갔던 담당자에게 '다음에는 저런 표현 쓰지 않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출판하면 그 출판된 책이 잘 팔려야 한다는 현실, 그리고 저자를 '포장'해야 책이 잘 팔린다는 그 딜레마를 안고서 출판계에서 그런 표현들을 쓰곤 하는 것을 알기에, 내가 단순히 화 내고 비판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잘 이해한다. 그렇기에, 나의 웃음과 함께 나에 대한 이러한 '과대포장'에 대한 불편함을 표현하곤 한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 '시대,' 또는 '인문학'의 멘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3. 인간의 모든 지식이란,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일지라도, 자신의 구체적 정황속에서 구성된다. '상황지워진 지식(situated knowledge)'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산 사상가/종교가/정치가/철학자들이라도, 그들 모두 이런저런 장점만이 아니라, 한계와 단점을 지닌 '인간'이다. 소위 '영웅적 삶'을 살았다는 칭송 받는 인물에 대하여 내가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이유이다. 인간은 이러한 자신만의 한계들, 딜레마들, 혼돈들 한 가운데서 좌충우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견디어 내는' 생존자들(survivors) 이다. 각기 지닌 삶의 짐의 무게를 객관적 잣대로 비교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렇게 될 때, 삶의 짐의 위계를 구성하며, 그러한 삶의 짐의 위계화는 아픔을 비인간화시키는 행위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4. 오늘도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가까운 타자들(close others) 에게,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모르는 먼 타자들(distant others)에게 나즈막이 전한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텨 내라고. 잘 견뎌 내라고 (just hang-in-there). 그리고 이 살아있음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좋은 것'들과 만나기 위한 '의도성'과 '용기'를 작동시키라고.
'언제나'가 어렵다면 '간혹'이라도.